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고구려 답사를 다녀와서

고구려 답사 7일은 제 인생에서 매우 의미있는 시간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마 제가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 의미가 더해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정상 먼저 떠나게 되자 마지막 식사에서 교수님께서는 건배제의를 하라고 하셨고,

즉흥반 준비반으로 했던 권주가는  


"비록 마지막 날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제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많은 분들에게,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신 분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함께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구려 답사 - 07.03


고구려 답사 마지막 날, 대련에 있는 비사성을 찾아 떠났습니다.

 


얼마 전 발생한 사고 때문에, 자동차로 올라 갈 수 없어서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지난 번 답사 때는 비사성을 차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매우 경사가 높은 가파른 길이었지만

비사성도 다른 성 못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손길승 교수님께서는 평소 심신수련과 트래킹으로 축지법을 연마하셨는지

우리가 힘들게 가고 있을 때, 이미 성문 위에 올라가셔서 우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험준한 산을 따라 성이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지중해와 크기나 모양새가 게다가 그 위치가 비슷합니다.

 

비사성은 은 요동반도의 끝에 위치하여서

날씨가 맑은 날에는 양쪽으로 바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렇게 67일의 고구려 답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답사 마지막 날 후기는 정준일 학생이 작성했습니다.]

고구려 답사 - 07.02

다시 비가 내리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서간도 지역, 압록강 철교를 향했습니다.


 

6.25가 일어나고 당시 중공군은 이 다리를 지나서 북한땅에 들어왔습니다.

다리 입구에는 그들을 기념하기 위한 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건너편 철교 위로 간간히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열차와 자동차가 보입니다.

 

 

6.25 전쟁으로 끊어진 다리는 60년의 세월을 지나

아직까지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전쟁 당시 사용한 포탄과 폭격으로 부서진 흔적을 박물관 유물처럼

보관하고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이 지역의 원래 명칭은 안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산당이 지역명을 공산화의 의미를 붙여 단동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잠시 묵념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근처에 있는 선착장에서 압록강 유람선을 탔습니다.

 

 

도시화, 현대화로 높은 빌딩이 들어서는 중국 땅과

2층 건물 하나, 작은 불빛 보기 힘든 북한 땅의 상반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 정부가 공통지역으로 설정한 국경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출발한 배에 탔다면 북한 땅을 밟기 전까지는

중국에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오후에는 고구려성(성산산성)을 향해 떠났습니다.


장하에 위치한 고구려의 옛 성(중국 장하시의 성산산성)으로

성의 외곽쪽에 물이 빠져나가는 수로가 있지만, 현재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이 성은 해안방어체제가 아닌, 해양방어체제로 보는 것이 적합한 이유는

단순히 해안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해안에서 상륙한 적들을 상대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성에서 물을 저장해놓았던 수로로 추측되는 곳은

단순한 저장시설이 아닌, 죄인을 심판하는 곳으로도 이용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로 밑에 죄인을 세워놓고 물을 채우기 시작하여 살아남으면 무죄,

죽으면 유죄로 죄의 대가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구려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었던 비석에는

이곳이 고구려의 옛성이라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곳은 높은 지형에 험준한 절벽으로 함락하기 어려운 성으로

각각의 봉우리에 있는 높은 지점에 경계지점 (초소와 비슷한)이 있는데,

각 초소는 서로 통신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구려 답사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오후 일정 답사 내용은 정준일 학생이 작성했습니다.]

 

고구려 답사 - 07.01

7월의 첫 날, 날씨가 정말 맑았습니다.

 

그동안 사용하지 못한 선글래스를 멋지게 쓰고 출발!


 

오늘의 첫 번째 답사 장소는 국동대혈, 나라동쪽에 있는 큰 동굴이라는 뜻입니다.


 

 

한 참 동안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언제쯤 도착할까 싶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눈앞에

마치 신이 손으로 뚫어 놓은 듯한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곳이 국동대혈입니다.


 

매년 10국중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면

왕이 직접 부여신(유화부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치면 개천절행사입니다.


 

점심식사는 70년대 방식으로 굽는 불고기였습니다.

어느덧 익숙해진 기름진 중국음식이었지만 우리는 개눈 감추듯 식사를 했다.

역시 우리는 한국사람이었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압록강 방어체계의 일환인 박작성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중국이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명나라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박작성을 묻어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684오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2층에 있는 박물관을 올라가 보니

진나라 당시 우리나라 국경을 두만강으로 설정한 지도가 보였습니다.

 

고구려는 북경지역까지 차지한 기록이 있고,

실제로 북경 외각에 고구려 성터가 있지만

전쟁으로 변한 국경을 이렇게 표기했다니 억울하고 아쉬웠습니다.

 

 

이곳은 실제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농사짓는 북한 주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발자국만 북한이라는 ‘일보가’기념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다음 장소를 향해 Jump!


 

고구려 답사 - 06.30

 

답사 나흘째, 중국에 와서 가장 맑고 더운 날입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Icon, <광개토호태왕비>를 찾아 갑니다.


 

국내성 동쪽에 위치한 6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념비로 아들 장수왕이 즉위 2년 되는 해 세웠습니다.

엄청난 업적을 세우고도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와의 차별화를 꿰하고자 고구려의 발전목표와 세계관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정부의 탁본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이고 있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해륙국가를 지향하는 고구려의 활약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호태왕비를 지나 우리는 태왕릉에 도착했습니다.

크기는 고구려자로 100, 높이는 9층으로 쌓은 거대한 무덤으로


9층으로 돌을 쌓기 위해서 모든 돌에 홈을 파서

견고하게 쌓아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내부에는 이후 만들어진 벽화나 보물이 있진 않지만

태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장수왕릉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명왕릉 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배산임수지역으로 풍수상 좋은 위치이며

그 중 뒷산인 용산이 매우 중요한데, 고구려에서 용은 바로 주몽을 상징하고,

장군총은 용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장군총은 3 21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22층으로 보이지만 가장 아랫 층은 기단석입니다.



3 x 7 = 21 우리 민족이 중요시 하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3’은 우리의 세계관으로, 天地人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messenger)의 원리입니다.

이는 연결과 화합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원리와는 다릅니다.


또한 21 '조선' 건국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으로 살아온 시간 즉 '21'을 뜻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외부인의 접근을 21일간 금줄로 막았습니다. .

 

 

점심식사는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에서

멋진 공연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미인이 많다는 자강도에서 온 아가씨는 예쁜 목소리로

<심장에 남는 사람>, <휘파람>, <반갑습니다> 등 다양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진수인 5회분 5호묘를 찾았습니다.


 

봉토석실묘는 고구려 초기(무영총, 각저총) '프레스코'방식으로 벽화를 그려서

크기가 작고 그 내용은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후기에는 돌판으로 건축한 내부(모줄임양식)에 다양한 내용을 담았는데

특히 사후세계나 신들의 세계등 종교적인 색채가 드러났습니다.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서 좌청용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을 넣었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과 다양한 색상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벽화에는 서른 아홉 마리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엉켜있다기 보다는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서로 연결(network)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농경을 뜻하는 소의 신(눈은 보석), 불의 신, /달신, 주몽용, 연꽃, 대장장이 신 등

다양한 소재를 무덤 벽에  빼곡히 담았다. 특히 천정을 가득 매운 황용(황제용)

천정이 아니라 하늘을 매운 듯 했다.

 


우리는 Mobility Stability를 동시에 갖춘 고구려인

감성과 지성 그리고 야성을 겸비한 고구려인을 만났습니다.

 

 

늦은 오후, 우리는 국내성의 수비성으로 임시수도로 사용한 환도산성에 도착했습니다.

후방과 좌우측에 높은 산이 있고, 입구는 옹벽구조여서 천연요새였습니다.



진입로와 초소의 모든 활동을 볼 수 있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우리는 2천 년의 고구려 장수와 같은 곳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점장대를 쌓은 퇴물림양식, 탑돌이 양식은 시간이 흘러 신라 첨성대에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얗게 변한 민들레 밭을 지나면서 우리는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다시 돌아온 압록강에서 보트를 탔는데, 놀이동산에 온 듯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국내성 서문벽을 찾았습니다.

국내성의 크기는 현재 남아있는 2km 남짓의 성벽 둘레로 규정지을 수 없고

실제 국내성의 크기나 그 영향력은 매우 광활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서문벽은 백성을 지키는 벽이며, 그들의 삶과 문화를 지키는 벽으로

왕과 귀족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쌓은 서양과 일본의 성벽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만주벌판을 가득 매운 별을 보러 떠났습니다.

김보람 학생이 <Fly me to the moon>을 부르고, 조강민 학생은 <Under the sea>를 불렀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우리, 어느새 고구려의 '3'의 정신을 이어 받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