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고구려 답사 - 06.30

 

답사 나흘째, 중국에 와서 가장 맑고 더운 날입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Icon, <광개토호태왕비>를 찾아 갑니다.


 

국내성 동쪽에 위치한 6미터가 넘는 거대한 기념비로 아들 장수왕이 즉위 2년 되는 해 세웠습니다.

엄청난 업적을 세우고도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와의 차별화를 꿰하고자 고구려의 발전목표와 세계관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정부의 탁본 내용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쓰이고 있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해륙국가를 지향하는 고구려의 활약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호태왕비를 지나 우리는 태왕릉에 도착했습니다.

크기는 고구려자로 100, 높이는 9층으로 쌓은 거대한 무덤으로


9층으로 돌을 쌓기 위해서 모든 돌에 홈을 파서

견고하게 쌓아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내부에는 이후 만들어진 벽화나 보물이 있진 않지만

태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장수왕릉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명왕릉 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배산임수지역으로 풍수상 좋은 위치이며

그 중 뒷산인 용산이 매우 중요한데, 고구려에서 용은 바로 주몽을 상징하고,

장군총은 용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장군총은 3 21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22층으로 보이지만 가장 아랫 층은 기단석입니다.



3 x 7 = 21 우리 민족이 중요시 하는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3’은 우리의 세계관으로, 天地人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messenger)의 원리입니다.

이는 연결과 화합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원리와는 다릅니다.


또한 21 '조선' 건국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으로 살아온 시간 즉 '21'을 뜻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외부인의 접근을 21일간 금줄로 막았습니다. .

 

 

점심식사는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에서

멋진 공연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미인이 많다는 자강도에서 온 아가씨는 예쁜 목소리로

<심장에 남는 사람>, <휘파람>, <반갑습니다> 등 다양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진수인 5회분 5호묘를 찾았습니다.


 

봉토석실묘는 고구려 초기(무영총, 각저총) '프레스코'방식으로 벽화를 그려서

크기가 작고 그 내용은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후기에는 돌판으로 건축한 내부(모줄임양식)에 다양한 내용을 담았는데

특히 사후세계나 신들의 세계등 종교적인 색채가 드러났습니다.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서 좌청용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을 넣었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과 다양한 색상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벽화에는 서른 아홉 마리 용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엉켜있다기 보다는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서로 연결(network)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농경을 뜻하는 소의 신(눈은 보석), 불의 신, /달신, 주몽용, 연꽃, 대장장이 신 등

다양한 소재를 무덤 벽에  빼곡히 담았다. 특히 천정을 가득 매운 황용(황제용)

천정이 아니라 하늘을 매운 듯 했다.

 


우리는 Mobility Stability를 동시에 갖춘 고구려인

감성과 지성 그리고 야성을 겸비한 고구려인을 만났습니다.

 

 

늦은 오후, 우리는 국내성의 수비성으로 임시수도로 사용한 환도산성에 도착했습니다.

후방과 좌우측에 높은 산이 있고, 입구는 옹벽구조여서 천연요새였습니다.



진입로와 초소의 모든 활동을 볼 수 있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우리는 2천 년의 고구려 장수와 같은 곳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점장대를 쌓은 퇴물림양식, 탑돌이 양식은 시간이 흘러 신라 첨성대에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얗게 변한 민들레 밭을 지나면서 우리는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다시 돌아온 압록강에서 보트를 탔는데, 놀이동산에 온 듯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국내성 서문벽을 찾았습니다.

국내성의 크기는 현재 남아있는 2km 남짓의 성벽 둘레로 규정지을 수 없고

실제 국내성의 크기나 그 영향력은 매우 광활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엇보다 서문벽은 백성을 지키는 벽이며, 그들의 삶과 문화를 지키는 벽으로

왕과 귀족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쌓은 서양과 일본의 성벽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만주벌판을 가득 매운 별을 보러 떠났습니다.

김보람 학생이 <Fly me to the moon>을 부르고, 조강민 학생은 <Under the sea>를 불렀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우리, 어느새 고구려의 '3'의 정신을 이어 받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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